루이나-고랜드 전쟁 د روئینا - ګولنډ جګړه جنگ روئینا - گولند Ruina-Goland War | |||
기간 | |||
2001년 10월 9일 ~ 2021년 8월 30일 (19년 10개월 3주) 재개입: 2022년 3월 ~ 현재 | |||
원인 | |||
장소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지원 국가 및 세력 | |||
외국인 의용병 걸프 지역 민간 후원자 | |||
지휘관 | |||
병력 | |||
루이나군 최대 120,000명 (2011년) 연 투입 누적인원 775,000명 ISAF 최대 142,000명 (2011년) 고랜드 정부군 약 310,000명 (2021년 1월)[7] 민간군사기업 약 110,000명 (2012년) | 탈레반 60,000~100,000명 (2021년) 알자미아 2,000명 안팎 (2001년) 알 카흐프 여단 2,000~4,000명 | ||
결과 | |||
탈레반의 승리, 루이나군의 철수 (2021) 탈레반의 아바나 재점령 재개입 이후 교착 (진행 중) | |||
영향 | |||
피해 | |||
탈레반 등 58,000~84,000명 사망 | |||
민간인 피해 | |||
민간인 사망 49,000명 이상 국내 이재민 약 850만 명 (2025년) | |||
1. 개요 [편집]
루이나-고랜드 전쟁은 2001년 1월 19일 1.19 사건 이후 루이나가 알자미아와 그 비호 세력인 탈레반을 상대로 고랜드에서 벌인 전쟁이다. 2001년 10월 9일 공습으로 시작되어 2021년 8월 30일 루이나군의 마지막 수송기가 아바나를 떠나기까지 19년 10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루이나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다. 2022년 루이나가 국제안보지원군을 다시 보내면서 전쟁은 끝나지 않은 채 두 번째 국면에 들어섰다.
이 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루이나가 손잡은 상대다. 루이나는 1980년대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에서 무자헤딘을 무장시켜 고랜드의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20년 뒤에는 바로 그 공산 정권과 동맹을 맺고 탈레반과 싸웠다. 2001년 12월 체결된 벨포르 협정으로 루이나는 고랜드 민주공화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인정했고, 공산 정부의 후원국인 사비에트는 탈레반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냉전이 끝나지 않은 세계에서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같은 편에 선 거의 유일한 전쟁이다.
개전 초기 루이나는 두 달 만에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알자미아의 지도자 이브라힘 나쉬디를 놓쳤고, 탈레반은 유고랜드 서부의 통제되지 않는 산악 국경지대에서 세력을 되찾았다. 2009년의 증파와 2011년 나쉬디 사살에도 전황은 뒤집히지 않았고, 2017년 출범한 정부는 탈레반과 아무런 협상 없이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2021년 여름 탈레반은 몇 달 만에 전국을 휩쓸고 아바나를 다시 점령했으며, 공산 정부는 1996년처럼 북부로 밀려났다.
1차 전쟁 기간 루이나군 2,712명이 전사했고, 고랜드 정부군과 탈레반, 민간인을 합쳐 18만 명 넘게 숨졌다. 루이나가 쓴 비용은 약 1조 4,000억 달러로 추산된다. 2022년 재개입 이후 공산 정부는 아바나 국제공항과 수도권 일부를 되찾았으나, 2025년 현재 탈레반은 국토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이 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루이나가 손잡은 상대다. 루이나는 1980년대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에서 무자헤딘을 무장시켜 고랜드의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20년 뒤에는 바로 그 공산 정권과 동맹을 맺고 탈레반과 싸웠다. 2001년 12월 체결된 벨포르 협정으로 루이나는 고랜드 민주공화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인정했고, 공산 정부의 후원국인 사비에트는 탈레반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냉전이 끝나지 않은 세계에서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같은 편에 선 거의 유일한 전쟁이다.
개전 초기 루이나는 두 달 만에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알자미아의 지도자 이브라힘 나쉬디를 놓쳤고, 탈레반은 유고랜드 서부의 통제되지 않는 산악 국경지대에서 세력을 되찾았다. 2009년의 증파와 2011년 나쉬디 사살에도 전황은 뒤집히지 않았고, 2017년 출범한 정부는 탈레반과 아무런 협상 없이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2021년 여름 탈레반은 몇 달 만에 전국을 휩쓸고 아바나를 다시 점령했으며, 공산 정부는 1996년처럼 북부로 밀려났다.
1차 전쟁 기간 루이나군 2,712명이 전사했고, 고랜드 정부군과 탈레반, 민간인을 합쳐 18만 명 넘게 숨졌다. 루이나가 쓴 비용은 약 1조 4,000억 달러로 추산된다. 2022년 재개입 이후 공산 정부는 아바나 국제공항과 수도권 일부를 되찾았으나, 2025년 현재 탈레반은 국토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2. 명칭 [편집]
루이나 정부와 군의 공식 명칭은 「고랜드 전쟁」이며, 2001~2014년 루이나군의 작전명은 「불변의 서약 작전」(Operation Steadfast Oath)이었다. 언론과 학계에서는 사비에트-고랜드 전쟁과 구별하기 위해 「루이나-고랜드 전쟁」이라는 이름을 주로 쓰고, 개전 계기를 따 「1.19 전쟁」, 기간을 따 「20년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고랜드 민주공화국 정부는 이 전쟁을 「반테러 조국 수호 전쟁」이라고 부른다. 1996년부터 이어진 탈레반과의 내전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이어서, 고랜드 정부의 공식 역사서에서 이 전쟁의 시작은 2001년이 아니라 1996년 아바나 함락이다. 탈레반은 「두 번째 반침략 지하드」라고 부르며, 사비에트에 맞선 1980년대의 싸움을 첫 번째로 친다.
고랜드 민주공화국 정부는 이 전쟁을 「반테러 조국 수호 전쟁」이라고 부른다. 1996년부터 이어진 탈레반과의 내전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이어서, 고랜드 정부의 공식 역사서에서 이 전쟁의 시작은 2001년이 아니라 1996년 아바나 함락이다. 탈레반은 「두 번째 반침략 지하드」라고 부르며, 사비에트에 맞선 1980년대의 싸움을 첫 번째로 친다.
3. 배경 [편집]
3.1. 탈레반의 집권과 북부 항전 [편집]
상세 내용은 고랜드 민주공화국 문서 참고.
1989년 사비에트군이 철수한 뒤에도 고랜드 민주공화국의 공산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1992년부터 무자헤딘 파벌들이 아바나를 포위하고 서로 싸우는 사이 1994년 칸다하르에서 탈레반이 등장했고, 1996년 9월 27일 탈레반은 아바나를 점령해 고랜드 이슬람 토후국을 선포했다. 무함마드 나지불라의 공산 정부는 북부 마자르이샤리프로 물러나 우즈베크계 민병대 지도자 압둘 라시드 도스툼과 함께 버텼다.
2001년 초 탈레반은 국토의 약 90%를 장악하고 있었다. 탈레반에 맞서는 세력은 북부의 공산 정부와 도스툼의 민병대, 그리고 판지시르 계곡을 근거지로 한 타지크계 무자헤딘 지도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세력 정도였다. 마수드는 1980년대 공산 정부와 사비에트군에 맞서 싸운 인물로, 탈레반 집권 이후에는 공산 정부와 불편한 휴전을 유지하며 각자 탈레반과 싸우고 있었다.
국제사회 대부분은 토후국을 승인하지 않았고, 북부로 밀려난 고랜드 민주공화국이 유엔 의석을 유지했다. 그러나 루이나는 공산 정부를 여전히 적성 정권으로 보았고, 1991년 무기 지원 중단 이후 사비에트와 공산 정부의 관계도 냉랭했다. 사비에트는 남부 국경의 안정과 교역을 위해 탈레반과 실무적인 거래를 이어 갔고, NIA는 "당장의 적은 공산주의"라는 논리로 탈레반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기까지 했다.
3.2. 알자미아와 이브라힘 나쉬디 [편집]
상세 내용은 알자미아 문서 참고.
알자미아(알후라 알자미아)는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에 참전한 아랍계 외국인 의용병 네트워크에서 태어난 국제 지하드 조직이다. 1988년 8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재벌 가문 출신의 이브라힘 나쉬디가 이집트 출신 의사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과 함께 유고랜드 나시르 알 물크에서 창설했다. 나쉬디는 사우디 왕가를 배교자로 규정하며 지하드를 선포했고, 사비에트가 물러난 뒤에는 이슬람 세계의 세속 정권을 뒷받침하고 유고랜드에 군대를 주둔시킨 루이나를 '먼 적'으로 규정했다.
1996년 나쉬디는 탈레반의 초청으로 고랜드에 본거지를 옮겼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우마르 알-칸다하리는 파슈툰 부족의 손님 환대 관습을 들어 나쉬디를 보호했고, 알자미아는 고랜드 동부와 남부에 훈련소를 세워 이슬람권 각지에서 온 청년 수천 명을 훈련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탈레반의 전선에 투입되어 북부의 공산 정부군과 싸웠다.
루이나는 1997년 알자미아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1998년에는 루이나 해군이 고랜드 동부의 알자미아 훈련소를 순항미사일로 타격했으나 나쉬디는 몇 시간 전에 자리를 뜬 뒤였다. 2000년 RNS 콜 테러사건 이후에도 루이나 정부는 알자미아의 목표가 해외 주둔 루이나군에 머문다고 보고 해외 시설의 경계를 강화하는 데 그쳤다. 2000년 12월 29일 알자미아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오보레의 비행학교에서 체포되었지만, 그가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3.3. 1.19 사건 [편집]
상세 내용은 1.19 사건 문서 참고.
2001년 1월 19일 오전, 알자미아 조직원 17명이 루이나 국내선 여객기들을 노린 동시다발 납치를 벌였다. 납치된 NA302편은 9시 3분 벨포르 루이나 세계무역센터 북탑에, NA471편은 9시 42분 남탑에 충돌했고, 대통령궁을 노린 NA145편은 9시 55분 에포르 공항에서 저지되었다. 두 탑은 모두 무너졌고, 민간인 2,891명을 포함해 2,908명이 숨졌다.
퇴임을 여덟 달 앞둔 클라렌스 J. 발렌타인 대통령은 사건 사흘 뒤 전국 생중계 특별 담화를 발표했고, 의회는 9일 만에 국토안보법을 만장일치로 제정했다. 루이나 정보당국은 사건 이틀 만에 알자미아를 배후로 지목했다.
3.4. 최후통첩과 탈레반의 거부 [편집]
1월 22일 북랜드해협조약기구(NLTO)는 창설 이후 처음으로 헌장 제5조의 집단방위 조항을 발동했다. 1월 25일 루이나 의회는 1.19 사건의 계획과 실행, 비호에 관여한 모든 국가와 조직에 대해 대통령에게 무력 사용 권한을 주는 결의를 채택했다. 상원에서는 반대 1표, 하원에서는 반대 3표가 나왔다.
1월 26일 발렌타인 정부는 탈레반에 다섯 가지 요구를 담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나쉬디와 알자미아 지도부의 인도, 억류 중인 외국인의 석방, 고랜드 안의 모든 훈련소 폐쇄, 훈련소 사찰을 위한 루이나 조사단의 입국 허용, 알자미아 조직원 전원의 인도였다. 루이나는 이 요구가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아바나의 이슬람 성직자 회의는 나쉬디에게 자진 출국을 권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물라 우마르는 이를 거부했다. 손님을 적에게 넘기는 것은 파슈툰 부족의 명예를 버리는 일이며, 한 번 굴복하면 루이나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탈레반은 나쉬디가 1.19 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요구했고, 루이나가 공습을 하지 않는다면 나쉬디를 제3국의 이슬람 법정에 세울 수 있다고 제안했다. 루이나는 이를 시간 끌기로 보고 거부했다.
2월 3일 루이나 해군은 고랜드 동부 호스트주와 남부 칸다하르 인근의 알자미아 훈련소 네 곳에 순항미사일 79발을 쏘았다. 그러나 훈련소는 대부분 비어 있었고, 공격은 1998년처럼 상징적인 보복에 그쳤다. 이 공격 이후 루이나 정부 안에서는 지상군 없이는 나쉬디를 잡을 수 없다는 결론이 굳어졌다.
1월 26일 발렌타인 정부는 탈레반에 다섯 가지 요구를 담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나쉬디와 알자미아 지도부의 인도, 억류 중인 외국인의 석방, 고랜드 안의 모든 훈련소 폐쇄, 훈련소 사찰을 위한 루이나 조사단의 입국 허용, 알자미아 조직원 전원의 인도였다. 루이나는 이 요구가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아바나의 이슬람 성직자 회의는 나쉬디에게 자진 출국을 권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물라 우마르는 이를 거부했다. 손님을 적에게 넘기는 것은 파슈툰 부족의 명예를 버리는 일이며, 한 번 굴복하면 루이나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탈레반은 나쉬디가 1.19 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요구했고, 루이나가 공습을 하지 않는다면 나쉬디를 제3국의 이슬람 법정에 세울 수 있다고 제안했다. 루이나는 이를 시간 끌기로 보고 거부했다.
2월 3일 루이나 해군은 고랜드 동부 호스트주와 남부 칸다하르 인근의 알자미아 훈련소 네 곳에 순항미사일 79발을 쏘았다. 그러나 훈련소는 대부분 비어 있었고, 공격은 1998년처럼 상징적인 보복에 그쳤다. 이 공격 이후 루이나 정부 안에서는 지상군 없이는 나쉬디를 잡을 수 없다는 결론이 굳어졌다.
3.5. 적의 적: 공산 정부와의 비밀 교섭 [편집]
문제는 누구와 함께 싸우느냐였다. 고랜드는 북부의 짧은 해안을 빼면 사방이 산악과 사막인 나라이고, 루이나가 지상군 수만 명을 보내 탈레반 정권을 직접 무너뜨리는 것은 병참과 여론 모두에서 무리였다. 루이나군 합동참모본부는 현지 지상 세력과 루이나의 공군·특수부대를 결합하는 방식이 유일한 현실적 선택지라고 보고했다.
그 지상 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둘뿐이었다. 가장 큰 조직된 병력을 가진 것은 북부의 공산 정부군과 도스툼의 민병대였고, 루이나가 부담 없이 손잡을 수 있는 반공 세력은 마수드의 판지시르 세력이었다. 그러나 마수드는 1.19 사건 이틀 전인 1월 17일 기자로 위장한 알자미아 조직원 두 명의 자폭 공격으로 숨졌다. 루이나 정보당국은 이 암살을 1.19 이후 루이나가 손잡을 상대를 미리 없앤 사전 공작으로 보았다. 지도자를 잃은 판지시르 세력은 후계자 모하마드 파힘 아래에서 명맥을 유지했지만 독자적인 공세를 펼칠 힘은 없었다.
남은 것은 공산 정부였다. 공산 정부는 마자르이샤리프를 중심으로 북부 여러 주와 고랜드의 유일한 대외 항구인 하이라탄항을 쥐고 있었고, 5년 동안 탈레반과 싸워 온 병력과 사비에트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루이나의 해상 보급로가 고랜드 땅에 닿을 수 있는 곳도 공산 정부 지역뿐이었다. 그러나 루이나 안에서 이 선택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1980년대 루이나는 이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무자헤딘에게 페리트 미사일까지 쥐여 주었고, 루이나 보수 진영에게 고랜드 공산 정권은 사비에트의 꼭두각시 그 자체였다.
교섭의 창구는 사비에트였다. 2001년 3월 NIA 부국장이 사비에트 테르미스크에서 사비에트 KGB 관계자를 만나 공산 정부와의 접촉을 타진했고, 4월 테르미스크의 국경경비대 영빈관에서 루이나와 고랜드 공산 정부, 사비에트의 첫 3자 비밀 회담이 열렸다. 8월까지 이어진 이른바 「테르미스크 교섭」의 쟁점은 셋이었다.
* 체제 보장: 공산 정부는 루이나가 사회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체제 변경을 목적으로 한 어떤 활동도 지원하지 않겠다는 문서상 약속을 요구했다. 루이나는 처음에 "탈레반 이후의 정치 질서는 고랜드인이 정한다"는 모호한 표현을 제안했으나, 공산 정부는 이를 1980년대의 재판으로 보고 거부했다.
* 사비에트의 몫: 사비에트는 탈레반과의 거래를 끊는 대가로 루이나군이 사비에트 국경과 맞닿은 북부 주에 상설 기지를 두지 않을 것과, 전후 고랜드 광물 개발에서 사비에트 기업의 기득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 화해 조항: 루이나는 국내 여론을 설득할 명분으로 탈레반 축출 이후 무자헤딘 출신 세력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조항을 요구했다. 공산 정부는 일당제를 흔들지 않는 범위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이것이 훗날 「민족 화해 과도기」 조항이 되었다.
교섭이 길어진 데에는 루이나의 정권 교체도 한몫했다. 발렌타인 정부는 퇴임을 앞두고 공산 정권과의 동맹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떠안기를 꺼렸고, 대통령 당선인 로널드 캘러핸 측은 자신이 서명하지 않은 약속에 묶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8월 28일 NIA 국장과 고랜드 공산 정부 외무장관이 교섭 결과를 정리한 「마자르 각서」에 가서명했고, 사비에트는 구두로 보증했다. 각서의 존재는 개전 뒤인 12월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9월 캘러핸이 취임했고, 그는 취임 2주 만에 합동참모본부의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1.19 사건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개전이 늦어진 이유가 12월에 드러나자 루이나 보수 언론은 "벨포르가 불타는 동안 테르미스크에서 차를 마셨다"고 비판했고, 훗날 비판자들은 이 8개월 동안 알자미아가 지도부와 자금을 분산시킬 시간을 벌었다고 지적한다. 반면 이 기간이 없었다면 루이나는 지상 동맹도 해상 보급로도 없이 전쟁을 시작해야 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 지상 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둘뿐이었다. 가장 큰 조직된 병력을 가진 것은 북부의 공산 정부군과 도스툼의 민병대였고, 루이나가 부담 없이 손잡을 수 있는 반공 세력은 마수드의 판지시르 세력이었다. 그러나 마수드는 1.19 사건 이틀 전인 1월 17일 기자로 위장한 알자미아 조직원 두 명의 자폭 공격으로 숨졌다. 루이나 정보당국은 이 암살을 1.19 이후 루이나가 손잡을 상대를 미리 없앤 사전 공작으로 보았다. 지도자를 잃은 판지시르 세력은 후계자 모하마드 파힘 아래에서 명맥을 유지했지만 독자적인 공세를 펼칠 힘은 없었다.
남은 것은 공산 정부였다. 공산 정부는 마자르이샤리프를 중심으로 북부 여러 주와 고랜드의 유일한 대외 항구인 하이라탄항을 쥐고 있었고, 5년 동안 탈레반과 싸워 온 병력과 사비에트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루이나의 해상 보급로가 고랜드 땅에 닿을 수 있는 곳도 공산 정부 지역뿐이었다. 그러나 루이나 안에서 이 선택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1980년대 루이나는 이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무자헤딘에게 페리트 미사일까지 쥐여 주었고, 루이나 보수 진영에게 고랜드 공산 정권은 사비에트의 꼭두각시 그 자체였다.
교섭의 창구는 사비에트였다. 2001년 3월 NIA 부국장이 사비에트 테르미스크에서 사비에트 KGB 관계자를 만나 공산 정부와의 접촉을 타진했고, 4월 테르미스크의 국경경비대 영빈관에서 루이나와 고랜드 공산 정부, 사비에트의 첫 3자 비밀 회담이 열렸다. 8월까지 이어진 이른바 「테르미스크 교섭」의 쟁점은 셋이었다.
* 체제 보장: 공산 정부는 루이나가 사회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체제 변경을 목적으로 한 어떤 활동도 지원하지 않겠다는 문서상 약속을 요구했다. 루이나는 처음에 "탈레반 이후의 정치 질서는 고랜드인이 정한다"는 모호한 표현을 제안했으나, 공산 정부는 이를 1980년대의 재판으로 보고 거부했다.
* 사비에트의 몫: 사비에트는 탈레반과의 거래를 끊는 대가로 루이나군이 사비에트 국경과 맞닿은 북부 주에 상설 기지를 두지 않을 것과, 전후 고랜드 광물 개발에서 사비에트 기업의 기득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 화해 조항: 루이나는 국내 여론을 설득할 명분으로 탈레반 축출 이후 무자헤딘 출신 세력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조항을 요구했다. 공산 정부는 일당제를 흔들지 않는 범위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이것이 훗날 「민족 화해 과도기」 조항이 되었다.
교섭이 길어진 데에는 루이나의 정권 교체도 한몫했다. 발렌타인 정부는 퇴임을 앞두고 공산 정권과의 동맹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떠안기를 꺼렸고, 대통령 당선인 로널드 캘러핸 측은 자신이 서명하지 않은 약속에 묶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8월 28일 NIA 국장과 고랜드 공산 정부 외무장관이 교섭 결과를 정리한 「마자르 각서」에 가서명했고, 사비에트는 구두로 보증했다. 각서의 존재는 개전 뒤인 12월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9월 캘러핸이 취임했고, 그는 취임 2주 만에 합동참모본부의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1.19 사건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개전이 늦어진 이유가 12월에 드러나자 루이나 보수 언론은 "벨포르가 불타는 동안 테르미스크에서 차를 마셨다"고 비판했고, 훗날 비판자들은 이 8개월 동안 알자미아가 지도부와 자금을 분산시킬 시간을 벌었다고 지적한다. 반면 이 기간이 없었다면 루이나는 지상 동맹도 해상 보급로도 없이 전쟁을 시작해야 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4. 전개 [편집]
4.1. 2001년: 개전과 탈레반 정권의 붕괴 [편집]
4.1.1. 공습 개시 [편집]
2001년 10월 9일 밤, 루이나는 「불변의 서약 작전」을 시작했다. 랜드해협 남부에 전개한 루이나 해군 항공모함 두 척의 함재기와 유고랜드 기지에서 출격한 공군 폭격기, 순항미사일이 아바나와 칸다하르, 잘랄라바드의 탈레반 방공망과 지휘시설, 알자미아 훈련소를 동시에 타격했다. 탈레반의 빈약한 방공망과 공군은 첫날 밤에 사실상 사라졌다.
공습과 함께 NIA 준군사팀과 루이나 육군 특전단의 12인조 팀들이 북부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공산 정부군과 도스툼 민병대의 지휘소에 붙어 공습을 유도했는데, 사비에트식 편제로 싸우는 정부군 장교들과 레이저 표적 지시기와 위성 통신을 든 루이나 특수부대원들의 협조는 양쪽 모두에게 낯선 일이었다. 사비에트에서 교육받은 정부군 장교들과는 다리어보다 러시아어로 말하는 편이 빨랐고, 첫 번째 팀의 무전 보고는 "통역이 필요한 건 다리어가 아니라 러시아어였다"는 말로 루이나군 안에서 유명해졌다.
공습과 함께 NIA 준군사팀과 루이나 육군 특전단의 12인조 팀들이 북부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공산 정부군과 도스툼 민병대의 지휘소에 붙어 공습을 유도했는데, 사비에트식 편제로 싸우는 정부군 장교들과 레이저 표적 지시기와 위성 통신을 든 루이나 특수부대원들의 협조는 양쪽 모두에게 낯선 일이었다. 사비에트에서 교육받은 정부군 장교들과는 다리어보다 러시아어로 말하는 편이 빨랐고, 첫 번째 팀의 무전 보고는 "통역이 필요한 건 다리어가 아니라 러시아어였다"는 말로 루이나군 안에서 유명해졌다.
4.1.2. 북부 공세와 아바나 수복 [편집]
11월 초 공산 정부군과 도스툼의 민병대, 판지시르 세력이 루이나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며 북부에서 일제히 공세에 나섰다. 11월 9일 탈로칸과 풀리쿰리가 떨어지면서 탈레반의 북부 전선은 폭격 아래에서 무너졌다. 11월 13일 공산 정부군 선두 부대가 아바나에 입성했다. 1996년 수도를 내준 지 5년 2개월 만이었다. 탈레반은 거의 저항하지 않고 남쪽으로 물러났다.
11월 26일에는 북부 쿤두즈에 고립된 탈레반 병력과 외국인 의용병 수천 명이 항복했다. 항복한 포로들은 도스툼 민병대의 시바르간 수용소로 옮겨졌는데, 컨테이너에 실려 이송되던 포로 수백 명이 질식해 숨진 사실이 뒤에 드러나면서 전쟁 초기의 대표적인 인권 문제가 되었다.
11월 26일에는 북부 쿤두즈에 고립된 탈레반 병력과 외국인 의용병 수천 명이 항복했다. 항복한 포로들은 도스툼 민병대의 시바르간 수용소로 옮겨졌는데, 컨테이너에 실려 이송되던 포로 수백 명이 질식해 숨진 사실이 뒤에 드러나면서 전쟁 초기의 대표적인 인권 문제가 되었다.
4.1.3. 벨포르 협정 [편집]
상세 내용은 벨포르 협정 문서 참고.
12월 5일 1.19 사건의 현장인 벨포르에서 루이나와 고랜드 민주공화국 정부가 협정에 서명했고, 사비에트는 부속 의정서에 서명했다. 테르미스크 교섭과 마자르 각서의 내용을 정식 조약으로 옮긴 이 협정으로 루이나는 고랜드 민주공화국 정부를 고랜드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그 사회주의 체제의 변경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으며, 사비에트는 탈레반과 알자미아에 대한 모든 지원과 교역을 끊었다. 루이나 정부가 이후 공식 문서에서 이 정부를 「고랜드 과도 민주정부」라고 부르게 된 것은 협정의 「민족 화해 과도기」 조항에서 비롯되었다.
협정 공개는 루이나 정계를 뒤흔들었다. 캘러핸은 서명식에서 "우리는 1.19의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약속했지, 1980년대의 전쟁을 다시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수 진영의 《르 나시오날》은 "붉은 별과의 결혼"이라고 비난했고, 진보 진영의 《라 부아》는 NIA가 1990년대 탈레반을 간접 지원했던 과거부터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1.19 사건 이후의 여론은 알자미아를 잡는 일이 먼저라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상원은 3분의 2가 넘는 찬성으로 협정을 비준했다.
4.1.4. 칸다하르 함락과 토라보라 [편집]
12월 초 탈레반 지도부 일부가 칸다하르를 넘기는 대가로 지도자들의 사면을 받는 조건부 항복을 타진했으나, 루이나는 탈레반과의 어떤 협상도 거부했다. 12월 8일 탈레반의 근거지 칸다하르가 함락되었고, 물라 우마르는 오토바이를 타고 산악지대로 달아났다. 탈레반 정권은 개전 두 달 만에 무너졌다.
나쉬디와 알자미아 지도부는 동부 낭가르하르주의 토라보라 동굴 요새로 들어갔다. 12월 12일부터 루이나 공군은 토라보라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었지만, 지상 공격은 공산 정부군이 아니라 현지 파슈툰 부족 민병대에 맡겨졌다. 동부 파슈툰 지역에 공산 정부군이 들어가면 부족들의 반발을 부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현장의 NIA 팀장은 유고랜드 쪽 퇴로를 막기 위해 루이나군 레인저 대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라마단 기간이라 해가 지면 싸움을 멈추는 부족 민병대 사이로, 나쉬디는 12월 중순 산길을 넘어 유고랜드 서부 나크시에 로스탐 부의 산악지대로 빠져나갔다.
12월 17일 루이나 정부는 토라보라 점령을 발표했다. 개전 이후 이때까지 루이나군 전사자는 19명이었고, 탈레반과 알자미아는 1만 명 넘게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나쉬디를 놓친 이 순간은 훗날 전쟁 전체의 흐름을 가른 실책으로 평가된다.
나쉬디와 알자미아 지도부는 동부 낭가르하르주의 토라보라 동굴 요새로 들어갔다. 12월 12일부터 루이나 공군은 토라보라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었지만, 지상 공격은 공산 정부군이 아니라 현지 파슈툰 부족 민병대에 맡겨졌다. 동부 파슈툰 지역에 공산 정부군이 들어가면 부족들의 반발을 부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현장의 NIA 팀장은 유고랜드 쪽 퇴로를 막기 위해 루이나군 레인저 대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라마단 기간이라 해가 지면 싸움을 멈추는 부족 민병대 사이로, 나쉬디는 12월 중순 산길을 넘어 유고랜드 서부 나크시에 로스탐 부의 산악지대로 빠져나갔다.
12월 17일 루이나 정부는 토라보라 점령을 발표했다. 개전 이후 이때까지 루이나군 전사자는 19명이었고, 탈레반과 알자미아는 1만 명 넘게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나쉬디를 놓친 이 순간은 훗날 전쟁 전체의 흐름을 가른 실책으로 평가된다.
4.2. 2002년: 안정화 작전 [편집]
2001년 12월 20일 유엔 결의에 따라 아바나와 그 주변의 치안을 맡을 국제안보지원군(ISAF)이 창설되었다. 루이나가 지휘를 맡았고 NLTO 회원국과 미합중제국 등 18개국이 병력을 보냈다. ISAF의 초기 임무는 아바나 수도권으로 한정되었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루이나군이 「불변의 서약 작전」의 틀에서 알자미아와 탈레반 잔존 세력을 추적했다. 고랜드 원정사령관 대니얼 P. 크로웰 중장이 두 작전을 함께 지휘했다.
2002년 3월 루이나군은 동부 팍티아주 샤히코트 계곡에 숨어든 탈레반과 알자미아 잔당을 소탕하는 「그물 작전」을 벌였다. 루이나군과 공산 정부군, 동맹국 특수부대 2,000여 명이 투입된 이 작전은 전쟁 초기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다. 해발 3,000m 능선에서 벌어진 고지전에서 루이나군 8명이 전사했고 적은 수백 명이 사살되었으나, 상당수는 유고랜드 국경 너머로 빠져나갔다.
같은 해 6월 아바나에서는 벨포르 협정의 「민족 화해 과도기」 조항에 따른 「민족 화해 회의」가 열렸다. 공산 정부와 판지시르 세력, 탈레반에 등을 돌린 남부 부족 지도자 등 1,600여 명이 모인 이 회의에서 무자헤딘 출신 세력의 정치 참여 방식이 정해졌다. 이들은 인민민주당의 통일전선 조직인 「민족조국전선」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내각과 국민회의에 자리를 얻었고, 판지시르 세력의 병력은 정부군에 편입되었다. 탈레반에게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 루이나의 가장 큰 고민은 고랜드 정부군이었다. 정부군은 사비에트식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각급 부대에 인민민주당의 정치위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루이나 의회는 2002년 국방수권법에 "공산당 조직이 지휘에 관여하는 군대에 대한 직접적 무기 지원"을 금지하는 조항을 넣었다. 이른바 「정치위원 조항」이다. 이 때문에 루이나의 정부군 지원은 한동안 훈련과 비살상 장비, ISAF 신탁기금을 거친 간접 지원으로 제한되었고, 정부군의 무기와 탄약은 여전히 사비에트에 기댔다. 루이나군 교관들은 사비에트제 소총을 든 병사들을 루이나식 교범으로 훈련시켜야 했다.
2002년 3월 루이나군은 동부 팍티아주 샤히코트 계곡에 숨어든 탈레반과 알자미아 잔당을 소탕하는 「그물 작전」을 벌였다. 루이나군과 공산 정부군, 동맹국 특수부대 2,000여 명이 투입된 이 작전은 전쟁 초기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다. 해발 3,000m 능선에서 벌어진 고지전에서 루이나군 8명이 전사했고 적은 수백 명이 사살되었으나, 상당수는 유고랜드 국경 너머로 빠져나갔다.
같은 해 6월 아바나에서는 벨포르 협정의 「민족 화해 과도기」 조항에 따른 「민족 화해 회의」가 열렸다. 공산 정부와 판지시르 세력, 탈레반에 등을 돌린 남부 부족 지도자 등 1,600여 명이 모인 이 회의에서 무자헤딘 출신 세력의 정치 참여 방식이 정해졌다. 이들은 인민민주당의 통일전선 조직인 「민족조국전선」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내각과 국민회의에 자리를 얻었고, 판지시르 세력의 병력은 정부군에 편입되었다. 탈레반에게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 루이나의 가장 큰 고민은 고랜드 정부군이었다. 정부군은 사비에트식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각급 부대에 인민민주당의 정치위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루이나 의회는 2002년 국방수권법에 "공산당 조직이 지휘에 관여하는 군대에 대한 직접적 무기 지원"을 금지하는 조항을 넣었다. 이른바 「정치위원 조항」이다. 이 때문에 루이나의 정부군 지원은 한동안 훈련과 비살상 장비, ISAF 신탁기금을 거친 간접 지원으로 제한되었고, 정부군의 무기와 탄약은 여전히 사비에트에 기댔다. 루이나군 교관들은 사비에트제 소총을 든 병사들을 루이나식 교범으로 훈련시켜야 했다.
4.3. 2003~2008년: 탈레반의 재기 [편집]
탈레반 지도부와 알자미아 잔당은 유고랜드 서부 나크시에 로스탐 부의 산악지대로 흘러들었다. 유고랜드 정부는 루이나의 충실한 동맹이었고 루이나군의 가장 큰 병참기지를 내주었지만, 행정력이 거의 닿지 않는 서부 산악 국경지대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때 넘어온 파슈툰 난민 수십만 명과 그 후손들이 난민촌과 산악 마을에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고, 수백 개의 산길로 이어진 국경은 지도 위에만 존재했다. 난민촌 주변의 마드라사들은 1980년대처럼 다시 탈레반의 신병 공급원이 되었다.
2003년 5월 탈레반 정권의 옛 대법원장 압둘 살람은 "탈레반이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여름부터 남부와 동부에서 매복과 로켓 공격이 늘었고, 탈레반은 밤마다 마을에 협박 편지를 붙여 정부에 협조하는 주민과 교사, 마을 원로들을 위협했다. 8월 11일 NLTO가 ISAF의 지휘권을 넘겨받았고, ISAF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북부, 서부, 남부, 동부 순으로 작전 지역을 전국으로 넓혔다.
2004년 고랜드 정부는 새 헌법을 공포해 인민민주당의 영도적 역할과 이슬람 국교를 함께 명문화했다. 같은 해 탈레반 사령관 물라 다둘라가 자폭 공격을 전술로 들여오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그때까지 알자미아의 전유물이던 자폭 공격은 2006년 한 해에만 130건을 넘었다. 루이나는 2004년부터 유고랜드 정부의 동의를 얻어 서부 국경지대에 무인기 공습을 시작했다.
2005년 6월 동부 쿠나르주에서는 탈레반 지휘관을 추적하던 루이나 해군 특수전단 정찰팀이 매복에 걸려 4명 가운데 3명이 전사했고, 이들을 구하러 간 헬기가 격추되어 16명이 더 숨졌다. 「매 둥지 작전」으로 불린 이 작전은 개전 이후 루이나 특수부대가 입은 가장 큰 피해였다.
2006년부터 NLTO 회원국 부대들이 남부에서 루이나군의 자리를 넘겨받기 시작했다. 플로렌시아군이 칸다하르주를, 마베라군이 헬만드주를 맡았는데, 헬만드는 양귀비 재배의 중심지이자 1880년 고랜드 부족들이 식민 지배자 마베라의 군대를 무찌른 마이완드 전투의 기억이 남은 곳이었다. 옛 식민 종주국 군대의 주둔은 헬만드 파슈툰인들의 반발을 불렀고, 마베라군은 여름 내내 헬만드 북부의 거점들에서 포위전을 치렀다. 그해 가을 칸다하르 서쪽 판즈와이에서는 플로렌시아군 주도의 「고르곤 작전」으로 탈레반 수백 명이 사살되었으나, 탈레반은 겨울이 지나자 돌아왔다.
2006년 5월 29일 아바나에서는 루이나군 수송 트럭이 제동 장치 고장으로 민간 차량들을 들이받는 사고가 나자 반루이나 폭동이 일어나 20명이 숨졌다. 2007년 3월에는 동부 낭가르하르주에서 폭탄 공격을 받은 루이나 해병대가 고속도로를 따라 달아나며 무차별 사격을 가해 민간인 12명이 숨지고 33명이 다쳤고, 해당 해병 부대 120명은 고랜드에서 철수 명령을 받았다.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도 쌓여 갔다. 결혼식 하객들이 탈레반 집결로 오인되어 폭격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고, 탈레반은 이를 선전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2008년 나지불라가 서기장직에서 물러나고 하미드 누르자이가 뒤를 이었다. 파슈툰계인 누르자이의 선출은 탈레반의 민족 기반을 흔들려는 인민민주당의 계산이었지만, 남부의 파슈툰 주민들에게 공산 정부는 여전히 북부 사람들과 무신론자들의 정부였다. 2008년 말 탈레반은 남부와 동부 여러 주에서 「밤의 정부」를 세우고 세금을 걷고 있었고, 루이나 정보당국은 탈레반의 상시 병력이 1.19 이전 수준인 2만 명 이상으로 회복되었다고 평가했다.
2003년 5월 탈레반 정권의 옛 대법원장 압둘 살람은 "탈레반이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여름부터 남부와 동부에서 매복과 로켓 공격이 늘었고, 탈레반은 밤마다 마을에 협박 편지를 붙여 정부에 협조하는 주민과 교사, 마을 원로들을 위협했다. 8월 11일 NLTO가 ISAF의 지휘권을 넘겨받았고, ISAF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북부, 서부, 남부, 동부 순으로 작전 지역을 전국으로 넓혔다.
2004년 고랜드 정부는 새 헌법을 공포해 인민민주당의 영도적 역할과 이슬람 국교를 함께 명문화했다. 같은 해 탈레반 사령관 물라 다둘라가 자폭 공격을 전술로 들여오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그때까지 알자미아의 전유물이던 자폭 공격은 2006년 한 해에만 130건을 넘었다. 루이나는 2004년부터 유고랜드 정부의 동의를 얻어 서부 국경지대에 무인기 공습을 시작했다.
2005년 6월 동부 쿠나르주에서는 탈레반 지휘관을 추적하던 루이나 해군 특수전단 정찰팀이 매복에 걸려 4명 가운데 3명이 전사했고, 이들을 구하러 간 헬기가 격추되어 16명이 더 숨졌다. 「매 둥지 작전」으로 불린 이 작전은 개전 이후 루이나 특수부대가 입은 가장 큰 피해였다.
2006년부터 NLTO 회원국 부대들이 남부에서 루이나군의 자리를 넘겨받기 시작했다. 플로렌시아군이 칸다하르주를, 마베라군이 헬만드주를 맡았는데, 헬만드는 양귀비 재배의 중심지이자 1880년 고랜드 부족들이 식민 지배자 마베라의 군대를 무찌른 마이완드 전투의 기억이 남은 곳이었다. 옛 식민 종주국 군대의 주둔은 헬만드 파슈툰인들의 반발을 불렀고, 마베라군은 여름 내내 헬만드 북부의 거점들에서 포위전을 치렀다. 그해 가을 칸다하르 서쪽 판즈와이에서는 플로렌시아군 주도의 「고르곤 작전」으로 탈레반 수백 명이 사살되었으나, 탈레반은 겨울이 지나자 돌아왔다.
2006년 5월 29일 아바나에서는 루이나군 수송 트럭이 제동 장치 고장으로 민간 차량들을 들이받는 사고가 나자 반루이나 폭동이 일어나 20명이 숨졌다. 2007년 3월에는 동부 낭가르하르주에서 폭탄 공격을 받은 루이나 해병대가 고속도로를 따라 달아나며 무차별 사격을 가해 민간인 12명이 숨지고 33명이 다쳤고, 해당 해병 부대 120명은 고랜드에서 철수 명령을 받았다.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도 쌓여 갔다. 결혼식 하객들이 탈레반 집결로 오인되어 폭격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고, 탈레반은 이를 선전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2008년 나지불라가 서기장직에서 물러나고 하미드 누르자이가 뒤를 이었다. 파슈툰계인 누르자이의 선출은 탈레반의 민족 기반을 흔들려는 인민민주당의 계산이었지만, 남부의 파슈툰 주민들에게 공산 정부는 여전히 북부 사람들과 무신론자들의 정부였다. 2008년 말 탈레반은 남부와 동부 여러 주에서 「밤의 정부」를 세우고 세금을 걷고 있었고, 루이나 정보당국은 탈레반의 상시 병력이 1.19 이전 수준인 2만 명 이상으로 회복되었다고 평가했다.
4.4. 2009~2011년: 증파 [편집]
4.4.1. 엘스워스 정부의 증파 [편집]
2009년 9월 사회민주당의 리처드 엘스워스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엘스워스는 선거 기간 내내 고랜드 전쟁이 방치되었다고 비판하며 "끝낼 수 있는 방식으로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취임 직전인 9월 4일 북부 쿤두즈주에서는 탈레반이 탈취한 연료 트럭 두 대를 노린 ISAF 공습으로 연료를 얻으러 모여든 주민을 포함해 최대 179명이 숨졌고, 같은 달 남부에서는 양귀비 단속 경찰을 태운 트럭이 지뢰에 폭발해 23명이 숨졌다.
ISAF 사령관 마커스 L. 벤틀리 대장은 9월 말 대통령에게 제출한 평가 보고서에서 "앞으로 12개월 안에 흐름을 되돌리지 못하면 탈레반을 이길 수 없게 될 것"이라며 최소 4만 명의 증원을 요구했다. 석 달의 논의 끝에 엘스워스는 12월 3일 루이나 국방대학 연설에서 3만 명 증파를 발표하면서, 동시에 2011년 7월부터 철수를 시작하겠다는 시한을 제시했다. 증파와 철수 시한을 한 연설에 담은 이 결정은 탈레반에게 "기다리면 된다"는 신호를 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엘스워스 정부는 증파와 함께 정치위원 조항을 폐지해 정부군에 대한 직접 무기 지원의 길을 열었다.
증파는 루이나 안에서 징병제 논쟁을 불렀다. 루이나는 남녀 모두를 징집하는 국가지만, 개전 이후 고랜드 파병은 직업군인과 파병을 지원한 징집병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증파 병력을 채우기 위해 국방부가 징집병의 「파병 지원」 절차를 부대 단위 일괄 서명으로 바꾸자 사실상의 강제 파병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2010년 봄 벨포르에서는 징집병 부모들이 주도한 반전 집회에 10만 명이 모였다.
증파는 보급로 문제도 드러냈다. 유고랜드를 거치는 동부 육로는 국경지대에서 탈레반의 공격에 시달렸고, 북부 하이라탄항의 처리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2009년 루이나는 사비에트와 협상해 테르미스크를 거쳐 고랜드 북부로 들어가는 철도로 비살상 물자를 나를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마지막 사비에트 군인이 걸어서 건넌 테르미스크의 「우정의 다리」 위로 20년 뒤 루이나군의 보급 열차가 지나가게 된 것이다.
ISAF 사령관 마커스 L. 벤틀리 대장은 9월 말 대통령에게 제출한 평가 보고서에서 "앞으로 12개월 안에 흐름을 되돌리지 못하면 탈레반을 이길 수 없게 될 것"이라며 최소 4만 명의 증원을 요구했다. 석 달의 논의 끝에 엘스워스는 12월 3일 루이나 국방대학 연설에서 3만 명 증파를 발표하면서, 동시에 2011년 7월부터 철수를 시작하겠다는 시한을 제시했다. 증파와 철수 시한을 한 연설에 담은 이 결정은 탈레반에게 "기다리면 된다"는 신호를 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엘스워스 정부는 증파와 함께 정치위원 조항을 폐지해 정부군에 대한 직접 무기 지원의 길을 열었다.
증파는 루이나 안에서 징병제 논쟁을 불렀다. 루이나는 남녀 모두를 징집하는 국가지만, 개전 이후 고랜드 파병은 직업군인과 파병을 지원한 징집병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증파 병력을 채우기 위해 국방부가 징집병의 「파병 지원」 절차를 부대 단위 일괄 서명으로 바꾸자 사실상의 강제 파병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2010년 봄 벨포르에서는 징집병 부모들이 주도한 반전 집회에 10만 명이 모였다.
증파는 보급로 문제도 드러냈다. 유고랜드를 거치는 동부 육로는 국경지대에서 탈레반의 공격에 시달렸고, 북부 하이라탄항의 처리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2009년 루이나는 사비에트와 협상해 테르미스크를 거쳐 고랜드 북부로 들어가는 철도로 비살상 물자를 나를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마지막 사비에트 군인이 걸어서 건넌 테르미스크의 「우정의 다리」 위로 20년 뒤 루이나군의 보급 열차가 지나가게 된 것이다.
4.4.2. 모쉬타락 작전 [편집]
2010년 2월 13일 루이나군과 마베라군, 고랜드 정부군 1만 5천여 명이 헬만드주 마르자의 탈레반 거점을 공격하는 「모쉬타락 작전」을 시작했다. 모쉬타락은 다리어로 '함께'라는 뜻으로, 고랜드 정부군이 처음으로 작전의 전면에 선 대규모 합동작전이었다. 마르자는 열흘 만에 점령되었고, ISAF는 "상자에 담긴 정부"를 곧바로 들여보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산 정부의 관리들은 남부 파슈툰 주민들에게 외지인이었고, 탈레반은 낮에는 사라졌다가 밤에 돌아왔다. 벤틀리는 몇 달 뒤 마르자를 "피 흘리는 궤양"이라고 불렀다.
2010년은 개전 이후 가장 격렬한 해였다. 급조폭발물 공격이 폭증했고, 루이나군 전사자는 한 해 동안 612명에 이르렀다. 6월 벤틀리는 잡지 인터뷰에서 대통령 참모진을 조롱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경질되었고, 후임 토머스 A. 레이번 대장은 탈레반 중간 지휘관을 겨냥한 특수부대 야간 급습을 크게 늘렸다.
2010년은 개전 이후 가장 격렬한 해였다. 급조폭발물 공격이 폭증했고, 루이나군 전사자는 한 해 동안 612명에 이르렀다. 6월 벤틀리는 잡지 인터뷰에서 대통령 참모진을 조롱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경질되었고, 후임 토머스 A. 레이번 대장은 탈레반 중간 지휘관을 겨냥한 특수부대 야간 급습을 크게 늘렸다.
4.4.3. 이브라힘 나쉬디 사살 [편집]
2011년 5월 7일 새벽, 루이나 해군 특수전단 대원 24명을 태운 헬기 두 대가 유고랜드 서부 나크시에 로스탐 부의 소도시 카르바즈 외곽에 있는 3층 저택에 내렸다. 「오리온 작전」으로 이름 붙은 이 급습에서 대원들은 40분 만에 저택을 장악하고 3층 침실에 있던 이브라힘 나쉬디를 사살했다. 1.19 사건으로부터 10년 3개월 만이었다.
은신처의 단서는 나쉬디의 전령이었다. NIA는 수년 동안 나쉬디의 전령 한 명을 추적한 끝에 2010년 여름 그가 드나드는 저택을 찾아냈고, 유고랜드 정보당국과 함께 8개월 동안 감시했다. 작전 당일 유고랜드 특수부대가 저택 주변 도로를 봉쇄하고 외곽 경계를 맡았다. 나쉬디가 5년 넘게 머문 저택이 유고랜드군 초소에서 불과 2km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유고랜드의 서부 통제력에 대한 의문을 낳았지만, 두 나라는 공동 발표에서 이를 "통제되지 않는 국경이 낳은 문제"로 정리했다.
엘스워스는 작전 직후 대국민 연설에서 "1.19의 희생자들에게 약속한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벨포르 세계무역센터 터에는 밤새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알자미아의 지도자 자리는 공동 창설자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이었다.
은신처의 단서는 나쉬디의 전령이었다. NIA는 수년 동안 나쉬디의 전령 한 명을 추적한 끝에 2010년 여름 그가 드나드는 저택을 찾아냈고, 유고랜드 정보당국과 함께 8개월 동안 감시했다. 작전 당일 유고랜드 특수부대가 저택 주변 도로를 봉쇄하고 외곽 경계를 맡았다. 나쉬디가 5년 넘게 머문 저택이 유고랜드군 초소에서 불과 2km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유고랜드의 서부 통제력에 대한 의문을 낳았지만, 두 나라는 공동 발표에서 이를 "통제되지 않는 국경이 낳은 문제"로 정리했다.
엘스워스는 작전 직후 대국민 연설에서 "1.19의 희생자들에게 약속한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벨포르 세계무역센터 터에는 밤새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알자미아의 지도자 자리는 공동 창설자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이었다.
4.4.4. 《아르시브》의 전쟁 일지 폭로 [편집]
2011년 10월, 그해 창간한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 《아르시브》가 2004~2010년 루이나군 작전 일지 8만 7천여 건을 입수해 공개했다. 일지에는 공식 발표에서 빠진 민간인 사망 사건 수백 건과, 루이나군이 정부군의 포로 학대와 정치위원의 전횡을 알고도 묵인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이 폭로로 《아르시브》는 창간 첫해에 루이나 탐사보도의 중심 매체로 떠올랐고, 전쟁에 대한 루이나 여론은 돌이킬 수 없게 기울었다.
4.5. 2011~2014년: 전환과 전투 임무 종료 [편집]
2011년 6월 엘스워스는 증파 병력 3만 명을 2012년 여름까지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8월 6일 동부 와르다크주에서 특수부대원을 태운 수송 헬기가 탈레반의 로켓추진유탄에 맞아 추락해 루이나 해군 특수전단원 22명을 포함한 31명이 숨졌다. 나쉬디를 사살한 부대가 석 달 만에 입은 이 피해는 루이나 특수전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손실로 남았다.
2012년 1월에는 루이나군 병사들이 탈레반 대원의 시신을 모욕하는 영상이 퍼졌고, 3월에는 칸다하르주 판즈와이에서 루이나군 하사 한 명이 한밤중에 기지를 빠져나가 두 마을의 민간인 16명을 살해했다. 정부군 제복을 입은 병사가 루이나군 교관에게 총을 쏘는 내부자 공격도 2011~2013년 사이 90건을 넘었다. 고랜드 정부는 루이나군의 마을 수색 작전 중단을 요구했고, 누르자이는 "동맹이 우리 국민을 지키지 못한다면 무엇을 지키는가"라고 공개적으로 반문했다.
2012년 11월 루이나 대선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리처드 콜턴이 엘스워스를 1.5%p 차로 꺾었다. 이 선거에 NIA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뒤에 루이나 국가정보국 여론조작 사건으로 드러났다. 이듬해인 2013년 6월 18일, ISAF는 전국의 치안 책임을 고랜드 정부군에 넘기는 절차를 마쳤다.
2013년 9월 취임한 콜턴은 안보를 국정의 중심에 두는 강경 보수 정치인이었지만, 고랜드 전쟁에서는 전임 정부의 철수 일정을 대체로 따랐다. 1.19 이후 12년이 지나 국민의 관심은 식어 있었고, 콜턴 정부의 안보 관심은 청평과의 해상 긴장에 쏠려 있었다. 2014년 10월 26일 루이나군은 헬만드의 최대 기지인 셸번 기지를 고랜드 정부군에 넘기고 전투 작전을 공식 종료했다. 12월 28일 아바나에서 ISAF 임무 종료식이 열렸고, 이듬해 1월부터 NLTO는 훈련과 자문 중심의 「버팀목 임무」를 시작했다. 고랜드에 남은 루이나군은 약 1만 명이었다.
전투 임무가 끝났다고 해서 루이나의 발길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떠나는 병력의 빈자리는 플라자 그룹의 플라자 PMC를 비롯한 민간군사기업이 메웠다. 2012년 고랜드에서 일하는 민간 계약 인원은 11만 명을 넘어 루이나군 병력보다 많았고, 경호와 수송, 기지 경비는 물론 정부군 조종사 훈련과 헬기 정비까지 맡았다.
2012년 1월에는 루이나군 병사들이 탈레반 대원의 시신을 모욕하는 영상이 퍼졌고, 3월에는 칸다하르주 판즈와이에서 루이나군 하사 한 명이 한밤중에 기지를 빠져나가 두 마을의 민간인 16명을 살해했다. 정부군 제복을 입은 병사가 루이나군 교관에게 총을 쏘는 내부자 공격도 2011~2013년 사이 90건을 넘었다. 고랜드 정부는 루이나군의 마을 수색 작전 중단을 요구했고, 누르자이는 "동맹이 우리 국민을 지키지 못한다면 무엇을 지키는가"라고 공개적으로 반문했다.
2012년 11월 루이나 대선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리처드 콜턴이 엘스워스를 1.5%p 차로 꺾었다. 이 선거에 NIA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뒤에 루이나 국가정보국 여론조작 사건으로 드러났다. 이듬해인 2013년 6월 18일, ISAF는 전국의 치안 책임을 고랜드 정부군에 넘기는 절차를 마쳤다.
2013년 9월 취임한 콜턴은 안보를 국정의 중심에 두는 강경 보수 정치인이었지만, 고랜드 전쟁에서는 전임 정부의 철수 일정을 대체로 따랐다. 1.19 이후 12년이 지나 국민의 관심은 식어 있었고, 콜턴 정부의 안보 관심은 청평과의 해상 긴장에 쏠려 있었다. 2014년 10월 26일 루이나군은 헬만드의 최대 기지인 셸번 기지를 고랜드 정부군에 넘기고 전투 작전을 공식 종료했다. 12월 28일 아바나에서 ISAF 임무 종료식이 열렸고, 이듬해 1월부터 NLTO는 훈련과 자문 중심의 「버팀목 임무」를 시작했다. 고랜드에 남은 루이나군은 약 1만 명이었다.
전투 임무가 끝났다고 해서 루이나의 발길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떠나는 병력의 빈자리는 플라자 그룹의 플라자 PMC를 비롯한 민간군사기업이 메웠다. 2012년 고랜드에서 일하는 민간 계약 인원은 11만 명을 넘어 루이나군 병력보다 많았고, 경호와 수송, 기지 경비는 물론 정부군 조종사 훈련과 헬기 정비까지 맡았다.
4.6. 2015~2021년: 버팀목 임무와 철수 [편집]
외국군이 줄어들자 탈레반의 공세는 오히려 거세졌다. 2015년 1월에는 탈레반과도 적대하는 새로운 극단주의 조직 「알 카흐프 여단」이 동부 낭가르하르에 모습을 드러냈다. 7월 고랜드 정부는 물라 우마르가 2013년에 이미 병사했다고 발표했고, 아크타르 만수르가 탈레반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
9월 28일 탈레반은 북부의 중심 도시 쿤두즈를 기습해 보름 동안 점령했다. 2001년 이후 탈레반이 주도(州都)를 점령한 것은 처음이었다. 반격 과정에서 10월 3일 루이나 공군의 건십이 쿤두즈의 국제 의료구호단체 외상 병원을 탈레반 거점으로 오인해 공격했고, 환자와 의료진 42명이 숨졌다. 쿤두즈 함락에 충격을 받은 콜턴은 10월 15일 2016년 말로 예정되어 있던 철수를 보류하고 약 9,800명의 병력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2016년 5월 만수르는 유고랜드 서부 국경지대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다 루이나 무인기 공습에 숨졌고, 이슬람 법학자 출신의 하이바툴라 아훈드자다가 뒤를 이었다. 같은 해 9월 고랜드 정부는 헤즈비 이슬라미의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1980년대 루이나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았던 무자헤딘 지도자가 공산 정부의 민족조국전선에 들어간 것이다.
2017년 9월 출범한 새 정부는 고랜드 전쟁의 종결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정부는 1년 반 가까이 전황을 재검토한 끝에 2019년 2월 "2021년 8월 31일까지 고랜드에서 모든 루이나군을 철수시킨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에는 탈레반과의 협상도, 고랜드 정부와의 사전 협의도 없었다. 정부는 탈레반과 마주 앉는 것 자체가 1.19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이자 벨포르 협정에 대한 배신이라고 설명했지만, 협상 없는 철수는 탈레반에게서 아무런 약속도 받아내지 못한 채 전장을 비우는 일이었다. 고랜드 정부는 "벨포르에서 맺은 약속은 스무 해짜리였는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같은 2019년 인민민주당 서기장에 오른 압둘 와히드 라힘자이는 사비에트에 추가 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북부 민병대를 다시 무장시켰다. 루이나군은 2020년 말 약 4,000명으로 줄었다. 탈레반은 루이나군 기지를 건드리지 않은 채 정부군 초소와 지방 도시를 하나씩 포위해 들어갔고, 공습과 계약 인력의 정비 지원이 끊길 날짜를 알게 된 정부군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탈레반과 개별적으로 항복 조건을 흥정하는 일이 번졌다.
2021년 5월 1일 최종 철수가 시작되자 탈레반은 전국적인 공세에 나섰다. 7월 초 루이나군은 최대 거점인 바그람 비행장을 밤사이 조용히 비웠고, 정부군은 루이나군이 떠난 사실을 몇 시간 뒤에야 알았다. 8월 6일 남서부의 자란지를 시작으로 열흘 사이 주도 스물여섯 곳이 잇따라 떨어졌다. 대부분의 도시는 싸움 없이 넘어갔다.
8월 15일 탈레반이 아바나에 들어왔다. 라힘자이와 당 지도부는 이날 오후 헬기로 마자르이샤리프로 옮겨 가 임시 수도를 선포했다. 1996년 이후 25년 만에 공산 정부가 다시 북부로 밀려난 것이다. 아바나 국제공항에는 탈출하려는 시민 수만 명이 몰려들었고, 이륙하는 루이나 공군 수송기의 바퀴에 매달렸던 사람들이 떨어져 숨지는 장면이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루이나군 5,800명이 다시 투입되어 공항을 지키며 대피 작전을 벌였다. 8월 26일 공항 동문에 몰린 인파 한가운데서 알 카흐프 여단의 자폭 공격이 일어나 루이나군 11명과 민간인 약 140명이 숨졌다. 사흘 뒤인 8월 29일에는 루이나 무인기가 공항을 노린 차량 폭탄으로 오인한 승용차를 공습해 어린이 7명을 포함한 구호단체 직원 일가 10명이 숨졌다. 8월 30일 밤 버팀목 임무의 마지막 사령관 캐서린 M. 오도널 대장을 태운 루이나 공군 수송기가 아바나를 떠났다. 루이나의 첫 번째 고랜드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9월 28일 탈레반은 북부의 중심 도시 쿤두즈를 기습해 보름 동안 점령했다. 2001년 이후 탈레반이 주도(州都)를 점령한 것은 처음이었다. 반격 과정에서 10월 3일 루이나 공군의 건십이 쿤두즈의 국제 의료구호단체 외상 병원을 탈레반 거점으로 오인해 공격했고, 환자와 의료진 42명이 숨졌다. 쿤두즈 함락에 충격을 받은 콜턴은 10월 15일 2016년 말로 예정되어 있던 철수를 보류하고 약 9,800명의 병력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2016년 5월 만수르는 유고랜드 서부 국경지대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다 루이나 무인기 공습에 숨졌고, 이슬람 법학자 출신의 하이바툴라 아훈드자다가 뒤를 이었다. 같은 해 9월 고랜드 정부는 헤즈비 이슬라미의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1980년대 루이나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았던 무자헤딘 지도자가 공산 정부의 민족조국전선에 들어간 것이다.
2017년 9월 출범한 새 정부는 고랜드 전쟁의 종결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정부는 1년 반 가까이 전황을 재검토한 끝에 2019년 2월 "2021년 8월 31일까지 고랜드에서 모든 루이나군을 철수시킨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에는 탈레반과의 협상도, 고랜드 정부와의 사전 협의도 없었다. 정부는 탈레반과 마주 앉는 것 자체가 1.19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이자 벨포르 협정에 대한 배신이라고 설명했지만, 협상 없는 철수는 탈레반에게서 아무런 약속도 받아내지 못한 채 전장을 비우는 일이었다. 고랜드 정부는 "벨포르에서 맺은 약속은 스무 해짜리였는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같은 2019년 인민민주당 서기장에 오른 압둘 와히드 라힘자이는 사비에트에 추가 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북부 민병대를 다시 무장시켰다. 루이나군은 2020년 말 약 4,000명으로 줄었다. 탈레반은 루이나군 기지를 건드리지 않은 채 정부군 초소와 지방 도시를 하나씩 포위해 들어갔고, 공습과 계약 인력의 정비 지원이 끊길 날짜를 알게 된 정부군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탈레반과 개별적으로 항복 조건을 흥정하는 일이 번졌다.
2021년 5월 1일 최종 철수가 시작되자 탈레반은 전국적인 공세에 나섰다. 7월 초 루이나군은 최대 거점인 바그람 비행장을 밤사이 조용히 비웠고, 정부군은 루이나군이 떠난 사실을 몇 시간 뒤에야 알았다. 8월 6일 남서부의 자란지를 시작으로 열흘 사이 주도 스물여섯 곳이 잇따라 떨어졌다. 대부분의 도시는 싸움 없이 넘어갔다.
8월 15일 탈레반이 아바나에 들어왔다. 라힘자이와 당 지도부는 이날 오후 헬기로 마자르이샤리프로 옮겨 가 임시 수도를 선포했다. 1996년 이후 25년 만에 공산 정부가 다시 북부로 밀려난 것이다. 아바나 국제공항에는 탈출하려는 시민 수만 명이 몰려들었고, 이륙하는 루이나 공군 수송기의 바퀴에 매달렸던 사람들이 떨어져 숨지는 장면이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루이나군 5,800명이 다시 투입되어 공항을 지키며 대피 작전을 벌였다. 8월 26일 공항 동문에 몰린 인파 한가운데서 알 카흐프 여단의 자폭 공격이 일어나 루이나군 11명과 민간인 약 140명이 숨졌다. 사흘 뒤인 8월 29일에는 루이나 무인기가 공항을 노린 차량 폭탄으로 오인한 승용차를 공습해 어린이 7명을 포함한 구호단체 직원 일가 10명이 숨졌다. 8월 30일 밤 버팀목 임무의 마지막 사령관 캐서린 M. 오도널 대장을 태운 루이나 공군 수송기가 아바나를 떠났다. 루이나의 첫 번째 고랜드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4.7. 2022년~현재: 재개입 [편집]
2021년 9월 취임한 루스탈지아 그래이는 철수 직후의 혼란 속에서 임기를 시작했다. 탈레반은 아바나에서 고랜드 이슬람 토후국의 재건을 선포하고 루이나에 전면 지하드를 선포했으며, 알 카흐프 여단은 루이나 본토 공격을 공언했다. 루이나는 벨포르 협정에 따라 마자르이샤리프의 공산 정부를 계속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고, 사비에트도 탈레반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래이 정부는 2022년 초 유엔 결의를 얻어 국제안보지원군의 재파병을 결정했다. 그래이는 의회 연설에서 "우리가 떠난 자리에서 무너진 것들에 대한 책임은 떠난 사람에게 있다"고 말했다. 2022년 3월 루이나군과 NLTO 병력은 「새벽 회랑 작전」으로 아바나 국제공항을 탈환하고, 공항에서 아바나 북부로 이어지는 회랑과 수도권 일부를 확보했다. 공산 정부는 5월 아바나 북부로 돌아왔지만 도심 남부는 여전히 탈레반의 손에 있다.
2022년 7월 31일 루이나 무인기가 탈레반 점령 아래의 아바나 남부 주택가에서 알자미아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미사일 두 발로 사살했다. 알자와히리를 숨겨 준 것이 하카니 네트워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탈레반이 알자미아와 관계를 끊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2023년부터 루이나는 해마다 12억 달러 이상의 군사·재정 원조를 보내고, 특수전 부대를 아바나 북부에 투입했으며, 플라자 PMC를 고용해 공산 정부를 지탱하고 있다. 사비에트도 경제 원조와 무기 공급을 늘렸다.
2023년 4월 19일 새벽, 루이나는 2021년 공항 테러를 일으킨 알 카흐프 여단의 지휘부가 숨어 있던 자르간 계곡의 지하 40m 터널 시설을 궤도 운동에너지 무기로 타격했다. 위성이 관통체를 분리하기 11분 전, 루이나는 사비에트에 이를 통보했다. 루이나 정부는 조직원 34명이 숨졌다고 발표했고, 그래이는 나흘 뒤 이 무기의 사용을 공식 인정했다. 탈레반은 인근 마을 주민 11명이 숨졌다고 주장했고, 루이나 국방부는 2024년 민간인 사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2024년 탈레반 토후국은 점령지에서 아편 재배를 전면 금지했다. 전쟁 자금줄을 스스로 끊는 듯한 이 조치는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으려는 계산으로 풀이되지만, 비축된 아편의 값이 치솟으면서 오히려 탈레반 지휘관들의 수입이 늘었다는 분석도 있다. 2025년 현재 탈레반은 국토의 70% 이상과 전략적 요충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공산 정부의 통제는 아바나 수도권과 국제공항, 북부의 몇몇 주요 도시에 머물러 있다. 탈레반은 드론과 급조폭발물을 앞세운 비대칭전으로 루이나군과 정부군을 압박하고 있고, 유엔에 따르면 고랜드의 국내 이재민은 약 850만 명에 이른다.
그래이 정부는 2022년 초 유엔 결의를 얻어 국제안보지원군의 재파병을 결정했다. 그래이는 의회 연설에서 "우리가 떠난 자리에서 무너진 것들에 대한 책임은 떠난 사람에게 있다"고 말했다. 2022년 3월 루이나군과 NLTO 병력은 「새벽 회랑 작전」으로 아바나 국제공항을 탈환하고, 공항에서 아바나 북부로 이어지는 회랑과 수도권 일부를 확보했다. 공산 정부는 5월 아바나 북부로 돌아왔지만 도심 남부는 여전히 탈레반의 손에 있다.
2022년 7월 31일 루이나 무인기가 탈레반 점령 아래의 아바나 남부 주택가에서 알자미아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미사일 두 발로 사살했다. 알자와히리를 숨겨 준 것이 하카니 네트워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탈레반이 알자미아와 관계를 끊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2023년부터 루이나는 해마다 12억 달러 이상의 군사·재정 원조를 보내고, 특수전 부대를 아바나 북부에 투입했으며, 플라자 PMC를 고용해 공산 정부를 지탱하고 있다. 사비에트도 경제 원조와 무기 공급을 늘렸다.
상세 내용은 신의 지팡이 문서 참고.
2023년 4월 19일 새벽, 루이나는 2021년 공항 테러를 일으킨 알 카흐프 여단의 지휘부가 숨어 있던 자르간 계곡의 지하 40m 터널 시설을 궤도 운동에너지 무기로 타격했다. 위성이 관통체를 분리하기 11분 전, 루이나는 사비에트에 이를 통보했다. 루이나 정부는 조직원 34명이 숨졌다고 발표했고, 그래이는 나흘 뒤 이 무기의 사용을 공식 인정했다. 탈레반은 인근 마을 주민 11명이 숨졌다고 주장했고, 루이나 국방부는 2024년 민간인 사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2024년 탈레반 토후국은 점령지에서 아편 재배를 전면 금지했다. 전쟁 자금줄을 스스로 끊는 듯한 이 조치는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으려는 계산으로 풀이되지만, 비축된 아편의 값이 치솟으면서 오히려 탈레반 지휘관들의 수입이 늘었다는 분석도 있다. 2025년 현재 탈레반은 국토의 70% 이상과 전략적 요충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공산 정부의 통제는 아바나 수도권과 국제공항, 북부의 몇몇 주요 도시에 머물러 있다. 탈레반은 드론과 급조폭발물을 앞세운 비대칭전으로 루이나군과 정부군을 압박하고 있고, 유엔에 따르면 고랜드의 국내 이재민은 약 850만 명에 이른다.
5. 주요 전투와 사건 [편집]
연도 | 사건 |
2001 |
|
2002 | 그물 작전, 민족 화해 회의 |
2003 | NLTO의 ISAF 지휘권 인수 |
2005 | 매 둥지 작전 |
2006 | 아바나 폭동, 헬만드 포위전, 고르곤 작전 |
2009 | 쿤두즈 연료 트럭 공습, 증파 발표 |
2010 | 모쉬타락 작전 |
2011 | 오리온 작전, 와르다크 헬기 격추, 《아르시브》 폭로 |
2014 | 루이나군 전투 작전 종료 |
2015 | 쿤두즈 함락, 쿤두즈 병원 오폭 |
2019 | 전면 철수 발표 |
2021 | 탈레반 대공세, 아바나 함락, 공항 테러 |
2022 | 새벽 회랑 작전, 알자와히리 사살 |
2023 | 자르간 계곡 타격 |
6. 실패 원인 [편집]
이 전쟁이 왜 실패했는지는 루이나에서 지금도 논쟁거리다. 흔히 거론되는 요인은 다음과 같다.
6.1. 동맹의 역설 [편집]
루이나는 알자미아를 잡기 위해 공산 정부와 손잡았지만, 이 동맹은 처음부터 탈레반에게 가장 좋은 선전 재료였다. 남부와 동부의 파슈툰 주민들에게 공산 정부는 1978년 이슬람 성직자들을 탄압하고 사비에트군을 불러들인 정권이었고, 그 정권이 이번에는 루이나군과 함께 돌아온 것이었다. 탈레반은 "무신론자와 십자군의 연합"이라는 구호 하나로 두 외세를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었다.
루이나 역시 이 동맹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치위원 조항은 2009년까지 폐지되지 않았고, 루이나 의회는 공산 정부에 대한 지원을 해마다 조건을 붙여서만 승인했다. 고랜드 정부는 루이나가 민족 화해를 명분으로 무자헤딘 출신 세력을 키워 체제를 흔든다고 의심했다. 서로를 믿지 않는 두 정부는 20년 동안 정부군 재건이라는 가장 중요한 과제를 끝내 함께 해내지 못했다.
루이나 역시 이 동맹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치위원 조항은 2009년까지 폐지되지 않았고, 루이나 의회는 공산 정부에 대한 지원을 해마다 조건을 붙여서만 승인했다. 고랜드 정부는 루이나가 민족 화해를 명분으로 무자헤딘 출신 세력을 키워 체제를 흔든다고 의심했다. 서로를 믿지 않는 두 정부는 20년 동안 정부군 재건이라는 가장 중요한 과제를 끝내 함께 해내지 못했다.
6.2. 통제되지 않는 국경 [편집]
유고랜드는 20년 내내 루이나의 충실한 동맹이었다. 루이나군의 가장 큰 병참기지와 공군기지를 내주었고, 무인기 공습에 동의했으며, 나쉬디 사살 작전에도 함께했다. 그러나 유고랜드 정부는 서부 나크시에 로스탐 부의 산악지대를 실제로 다스리지 못했다.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때 넘어온 파슈툰 난민과 그 후손들이 사는 이 지역에서 탈레반 지도부는 재정비하고, 신병을 모으고, 겨울을 났다. 루이나가 고랜드 안에서 아무리 이겨도 적은 국경 너머에서 다시 태어났다.
6.3. 목표의 혼선 [편집]
전쟁의 목표는 처음에는 나쉬디와 알자미아를 잡는 것이었으나,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탈레반의 재기를 막는 것, 고랜드 정부를 자립시키는 것으로 계속 넓어졌다. 그러나 루이나는 공산 정부를 '재건'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루이나 정부가 공식 문서에서 이 정부를 「과도 민주정부」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을 이기면 끝나는 전쟁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동안 루이나 국민의 인내는 바닥났다.
6.4. 민간인 피해와 부패 [편집]
공습과 야간 급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탈레반의 가장 효과적인 신병 모집 수단이었다. 원조는 부패의 연료가 되었다.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원조가 동시에 흘러드는 가운데 당 간부와 지방 군벌, 계약업체가 원조금을 나눠 가졌고, 서류상 31만 명이던 정부군 가운데 상당수는 급여만 받는 유령 병사였다. 양귀비 경제는 탈레반과 정부 측 지방 세력 모두의 돈줄이 되었다.
6.5. 협상 없는 철수 [편집]
마지막 요인은 끝내는 방식이었다. 루이나는 2001년 탈레반의 조건부 항복 타진을 거부했고, 20년 뒤에는 탈레반과도 고랜드 정부와도 합의하지 않은 채 철수 시한을 정했다. 탈레반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고, 정부군은 루이나의 공습과 정비 지원이 끊기는 날짜를 미리 알고 있었다. 2021년 여름의 붕괴는 전투에서 진 결과라기보다 싸울 이유를 잃은 군대가 항복을 흥정한 결과였다는 분석이 많다.
7. 평가 [편집]
루이나에서 이 전쟁은 흔히 "이긴 전투를 모두 합쳤더니 진 전쟁이 된" 사례로 불린다. 루이나군은 20년 동안 대규모 교전에서 거의 진 적이 없었고, 알자미아의 지도부를 궤멸시켰으며, 1.19 이후 루이나 본토에서 같은 규모의 테러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탈레반은 20년 전보다 더 넓은 땅을 장악하고 있다.
평가는 진영에 따라 갈린다. 보수 언론은 대체로 철수를 결정한 2017년 출범 정부와 전쟁 초기의 경량 전쟁 방침을 탓하고, 벨포르 협정 자체를 실책으로 보는 시각도 여전히 강하다. 진보 언론은 NIA가 1990년대 탈레반을 도운 일부터 테르미스크 교섭의 은폐, 민간인 피해 축소까지 전쟁 내내 이어진 정보기관의 책임을 묻는다. 2022년 재개입을 두고는 "철수의 책임을 지는 일"이라는 평가와 "같은 수렁에 두 번 들어간 일"이라는 비판이 맞선다.
고랜드 정부의 공식 평가는 이 전쟁을 탈레반과의 긴 내전 속 한 시기로 본다. 고랜드 정부의 역사서에서 루이나는 "1980년대에는 적을 무장시켰고, 2001년에는 동맹이 되었으며, 2021년에는 떠났다가 돌아온" 나라로 서술된다. 사비에트는 벨포르 협정을 "냉전의 예외"라고 부르며, 루이나의 실패를 사비에트가 1989년에 이미 얻은 교훈의 되풀이로 본다.
평가는 진영에 따라 갈린다. 보수 언론은 대체로 철수를 결정한 2017년 출범 정부와 전쟁 초기의 경량 전쟁 방침을 탓하고, 벨포르 협정 자체를 실책으로 보는 시각도 여전히 강하다. 진보 언론은 NIA가 1990년대 탈레반을 도운 일부터 테르미스크 교섭의 은폐, 민간인 피해 축소까지 전쟁 내내 이어진 정보기관의 책임을 묻는다. 2022년 재개입을 두고는 "철수의 책임을 지는 일"이라는 평가와 "같은 수렁에 두 번 들어간 일"이라는 비판이 맞선다.
고랜드 정부의 공식 평가는 이 전쟁을 탈레반과의 긴 내전 속 한 시기로 본다. 고랜드 정부의 역사서에서 루이나는 "1980년대에는 적을 무장시켰고, 2001년에는 동맹이 되었으며, 2021년에는 떠났다가 돌아온" 나라로 서술된다. 사비에트는 벨포르 협정을 "냉전의 예외"라고 부르며, 루이나의 실패를 사비에트가 1989년에 이미 얻은 교훈의 되풀이로 본다.
8. 사비에트-고랜드 전쟁과의 비교 [편집]
상세 내용은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문서 참고.
두 전쟁은 도시와 간선 도로를 점과 선으로만 통제했다는 점, 국경 너머의 은신처를 끝내 막지 못했다는 점, 외국군이 떠받친 현지 정부가 꼭두각시라는 선전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닮았다. 무엇보다 두 나라가 떠받친 현지 정부는 같은 고랜드 민주공화국 정부였다. 루이나의 한 군사사학자는 두 전쟁을 두고 "사비에트는 고랜드에서 전쟁 하나를 졌고, 루이나는 그 전쟁을 이긴 대가로 다음 전쟁을 얻었다"고 평했다.
9. 피해 [편집]
구분 | 사망 | 부상 |
루이나군 | 2,712명 | 22,480명 |
기타 ISAF | 1,046명 | 4,900명 |
고랜드 정부군 | 71,000~96,000명 | 미상 |
민간군사기업 | 4,120명 | 15,000명 이상 |
탈레반 등 | 58,000~84,000명 | 미상 |
민간인 | 49,000명 이상 | 미상 |
위 수치는 2001~2021년 기준이며, 재개입 이후 루이나군 전사자는 2025년까지 326명이다.
루이나가 1차 전쟁에 쓴 비용은 전비와 원조, 참전 군인 보훈 비용을 합쳐 약 1조 4,000억 달러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고랜드 재건과 정부군 지원에 들어간 돈은 약 1,500억 달러인데, 고랜드 재건 특별감사관실은 그 상당 부분이 부패와 부실 사업으로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살아 돌아온 참전 군인 가운데 상당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급조폭발물로 인한 뇌 손상을 안고 살고 있으며, 루이나에서는 이 전쟁에 동원된 세대를 「1.19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10. 사건 사고 [편집]
* 시바르간 포로 질식 사건 (2001): 쿤두즈에서 항복한 포로 수백 명이 이송 컨테이너 안에서 숨졌다.
* 아바나 폭동 (2006): 루이나군 트럭 사고가 반루이나 폭동으로 번져 20명이 숨졌다.
* 낭가르하르 민간인 총격 사건 (2007): 루이나 해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12명이 숨졌다.
* 쿤두즈 연료 트럭 공습 (2009): 탈취된 연료 트럭을 노린 공습으로 최대 179명이 숨졌다.
* 판즈와이 민간인 살해 사건 (2012): 루이나군 하사 한 명이 민간인 16명을 살해했다.
* 쿤두즈 병원 오폭 (2015): 국제 의료구호단체의 외상 병원이 공격받아 42명이 숨졌다.
* 아바나 국제공항 테러 (2021): 알 카흐프 여단의 자폭 공격으로 루이나군 11명과 민간인 약 140명이 숨졌다.
* 아바나 무인기 오폭 (2021): 구호단체 직원 일가 10명이 숨졌다.
* 아바나 폭동 (2006): 루이나군 트럭 사고가 반루이나 폭동으로 번져 20명이 숨졌다.
* 낭가르하르 민간인 총격 사건 (2007): 루이나 해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12명이 숨졌다.
* 쿤두즈 연료 트럭 공습 (2009): 탈취된 연료 트럭을 노린 공습으로 최대 179명이 숨졌다.
* 판즈와이 민간인 살해 사건 (2012): 루이나군 하사 한 명이 민간인 16명을 살해했다.
* 쿤두즈 병원 오폭 (2015): 국제 의료구호단체의 외상 병원이 공격받아 42명이 숨졌다.
* 아바나 국제공항 테러 (2021): 알 카흐프 여단의 자폭 공격으로 루이나군 11명과 민간인 약 140명이 숨졌다.
* 아바나 무인기 오폭 (2021): 구호단체 직원 일가 10명이 숨졌다.
11. 대중매체에서 [편집]
11.1. 영화 [편집]
* 《테르미스크의 밤》(2014, 루이나): 2001년 테르미스크 비밀 교섭을 다룬 정치 스릴러. NIA 부국장과 고랜드 공산 정부 외무차관 사이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 《여덟 번째 초소》(2018, 루이나): 헬만드 북부의 산악 초소에 고립된 징집병 소대를 그린 전쟁영화.
* 《동문》(2024, 루이나): 2021년 아바나 국제공항 대피 작전의 마지막 열흘을 다룬 영화. 공항 테러로 숨진 루이나군 11명의 유족이 자문에 참여했다.
* 《여덟 번째 초소》(2018, 루이나): 헬만드 북부의 산악 초소에 고립된 징집병 소대를 그린 전쟁영화.
* 《동문》(2024, 루이나): 2021년 아바나 국제공항 대피 작전의 마지막 열흘을 다룬 영화. 공항 테러로 숨진 루이나군 11명의 유족이 자문에 참여했다.
11.2. 소설 [편집]
* 《붉은 별 아래에서》(2011, 루이나): 고랜드 정부군 부대에 파견된 루이나군 고문관의 1년을 그린 장편소설. 러시아어로 명령하는 정치위원과 루이나식 교범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을 통해 동맹의 역설을 다뤘다.
* 《밤의 정부》(2016, 유고랜드): 탈레반이 세금을 걷는 남부 마을에서 자란 형제가 한 명은 정부군, 한 명은 탈레반이 되는 이야기.
* 《밤의 정부》(2016, 유고랜드): 탈레반이 세금을 걷는 남부 마을에서 자란 형제가 한 명은 정부군, 한 명은 탈레반이 되는 이야기.
11.3. 게임 [편집]
* 《그물》(2009, 루이나): 2002년 샤히코트 계곡 전투를 배경으로 한 1인칭 슈팅 게임.
12. 여담 [편집]
* NLTO 헌장 제5조가 발동된 것은 이 전쟁이 처음이자 지금까지 유일하다.
* 루이나군이 고랜드에서 싸운 적 가운데에는 1980년대 루이나가 무장시킨 무자헤딘 출신이 많았다. 하카니 네트워크를 세운 잘랄루딘 하카니는 1980년대 NIA가 가장 믿을 만한 지휘관으로 꼽아 자금을 댄 인물이었다. 반대로 루이나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았던 헤크마티아르는 2016년 공산 정부의 편에 섰다.
* 2021년 철수 과정에서 루이나군과 정부군이 남긴 장비 상당수가 탈레반의 손에 들어갔다. 1980년대의 페리트 미사일에 이어 루이나제 무기가 두 번째로 대량으로 적에게 넘어간 셈이다.
* 1.19 사건이 일어난 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 징집 연령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일부는 2021년 아바나 대피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루이나 언론은 이들을 "1.19에 태어나 1.19의 전쟁을 끝낸 세대"라고 불렀다.
* 벨포르 협정 이후 루이나 국방부의 예산 문서는 고랜드 정부군을 「과도 민주정부군」이라고만 적었고, 「인민민주당」이라는 이름은 20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다.
* 루이나군이 고랜드에서 싸운 적 가운데에는 1980년대 루이나가 무장시킨 무자헤딘 출신이 많았다. 하카니 네트워크를 세운 잘랄루딘 하카니는 1980년대 NIA가 가장 믿을 만한 지휘관으로 꼽아 자금을 댄 인물이었다. 반대로 루이나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았던 헤크마티아르는 2016년 공산 정부의 편에 섰다.
* 2021년 철수 과정에서 루이나군과 정부군이 남긴 장비 상당수가 탈레반의 손에 들어갔다. 1980년대의 페리트 미사일에 이어 루이나제 무기가 두 번째로 대량으로 적에게 넘어간 셈이다.
* 1.19 사건이 일어난 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 징집 연령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일부는 2021년 아바나 대피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루이나 언론은 이들을 "1.19에 태어나 1.19의 전쟁을 끝낸 세대"라고 불렀다.
* 벨포르 협정 이후 루이나 국방부의 예산 문서는 고랜드 정부군을 「과도 민주정부군」이라고만 적었고, 「인민민주당」이라는 이름은 20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다.
[1] 2010년 2월 모쉬타락 작전 당시 헬만드주 마르자 외곽에서 고랜드 정부군 병사들과 함께 관개 수로를 건너는 루이나 해병대원들.[2] 2002년 벨포르 협정의 「민족 화해 과도기」 조항에 따라 정부군에 편입되었다.[3] 2016년 고랜드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4] 2015년 등장. 탈레반과도 적대한다.[5] 벨포르 협정 부속 의정서에 따라 고랜드 정부군에 무기와 경제 원조를 제공했다. 전투 병력은 보내지 않았다.[6] 이 밖에 2017~2021년 재임한 대통령이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7] 서류상 병력. 실제 병력은 절반 안팎이었다는 추정이 많다.[8] 2001~2021년 기준. 재개입 이후 루이나군 전사자는 2025년까지 326명이다.